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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퍽퍽!!드라마 파르르르~~] 마리나MARINA-Medic's Story. Part.2
마리나MARINA-Medic's Story

2. As Time Goes By

길고 짐승 같은 하루였다.
쭉 짜여진 빨래처럼 후줄근한 몸으로 케네스는 자신의 독신자 아파트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다른 이들에겐 공휴일이었지만 그에겐 평소보다도 더욱 빡빡한 스케쥴의 압박이 심했던 날이었다.
조금은 짜증이 섞인 시선을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열쇠 꾸러미 쪽으로 떨어뜨렸다. 번들거리는 금속성의 빛이 아까, 번들거리는 이마와 반짝이는 치열을 빛내던 히스터 상임위 위원의 모습과 겹쳐졌다.
젠장.....
케네스는 열쇠 꾸러미를 손안에 꾹 움켜쥐고 막 들어서려던 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못하는 술이건만, 디오니소스의 유혹이 유달리 강력하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던 무선통화기의 차임벨이 요란스레 울려댔다. 반복적인, 단선적인 기계음의 연속일 뿐인데 유달리 다급하게 느껴졌던 것은 지금 자신의 불편한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케네스는 무선통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날세....”
  부였다. 차분하지만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 속에 알콜기가 숨길 수 없이 배어들어 있었다. 이 사람도 오늘 디오니소스의 유혹에 넘어간 건가. 케네스는 피식 열없는 웃음을 물었다.
“어딘가?”
“집 앞입니다만.....저도 술이나 한 잔 할까 생각중입니다.”
기계음으로 변조된 부의 웃음소리가 거칠게 흘러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참으로 애매한 우연이라는 느낌을 받는 모양이었다.
“여기......「KINO」인데 나오겠나?”
「KINO」,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또한 부나 몇몇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그닥 현 정치체제에서는 환영하지 않는 인디펜던트 영화나 음악을 듣는 장소였다. 이십대이건만, 사십대들이나 기억할 낭만을 그리워하는 시대착오적 모임. 부가 특유의 시니컬한 표현으로 정의내린 모임의 명칭이었다. 너무 길어서 그들끼리는 ‘나가리’라는 자체명칭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천천히 케네스는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날 따라 계단 창가를 통해 비치는 밤하늘과 달빛이 묘한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    

불을 켜지 않는 실내는 짙은 어둠에 물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붙박힌 듯 앉아 있다. 손에는 짙은 홍색의 포도주가 더욱 진한 향내를 침묵과 암흑에 덮힌 공간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장의 편지와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사진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묵직한 침묵만이 한참을 흐르고 있다.

  “각하......왜 불도 아니 밝히시고.....”
문이 열리며 젊은 여성이 들어선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빛을 발하는 금테안경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녀가 돌아서서 스위치를 찾으려 하자.
“그냥 이대로 있고 싶네......”
“.......”
여성은 잠시 리 제독을 바라보다 목례를 하고 문을 조용히 닫으며 사라진다. 다시금 들어차는 어둠. 어둠 속에서 리 제독은 한숨을 가볍게 토한 다음, 포도주 잔을 입에 가져간다. 혀끝에 감도는 포도향을 음미하며 리 제독은 잠시 시선을 천정으로 보낸다. 그저 불 꺼진 샹들리에와 장식들이 붙어있는 천정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무언가 색다른 것이 보이는 듯도 싶다.
“오해는 싫지만......”
다시금 한숨을 내뱉는 리 제독.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스탠드에 불을 밝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을 발하는 불빛에 리 제독의 얼굴이 드러난다. 아직은 주름살을 찾아보기 힘든 피부, 정말이지 반백의 머리만 아니라면 사십대 초반으로도 보일 수 있는 얼굴이다.  
잠시 시선을 둘지 몰라 허둥거리던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에 머문다. 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여인의 옆모습. 창백하고 야윈 뺨, 핏기가 가셔진 입술. 습기 가득한 눈망울과 파르르 떨리는 듯한 길다란 속눈썹. 리 제독은 한참이고 사진을 바라보다가 편지를 집어든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앙다물며, 호출버튼을 누른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인터폰을 통해 아까 여성의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 제독은 사진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연다.
“수비나(Subina)양 미안하지만.....내일 아침 일찍 찾아가야 할 곳이 있네.....”
잠시 말을 끊고 리 제독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 속에 박힌 여인의 입술이 열리기를 바라는 듯이, 그래서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그래서 자신이 지금 갇혀있는 이 미망을 벗어날 무언가를 말해달라는 듯한 간절함을 담아서.

                     ♠♠♠

부가 눈자위가 붉어진 얼굴로 막 들어서는 케네스를 일어나 맞이할 때, 테이블 위에는 독한 보드카와 칵테일 워터, 그리고 얼음통이 반 넘어 비워져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데이트가 잘 안 되셨나보군요.”
그냥 분위기 전환용으로 가볍게 실없이 던진 농담이었을 뿐인데 상대방의 반응은 사뭇 예상을 어긋나고 있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벽에 던져진 솜뭉치야.....나는.....”
특유의 시니컬함보다는 정체모를 우울함을 가득 드러내며 부는 방금 채운 술잔을 그대로 비워냈다. 저도 모르게 케네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혈관이 벌써 알콜을 받아들인 듯 바쁘게 뛰놀기 시작했다.
“자...자네도 한잔 받게....어서 받아.....”
케네스가 무어라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잔을 넘겨준 부는 철철 넘치도록 독한 보드카 술을 부어댄다. 낭패로군.....케네스는 속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거의 치사량인데.
“자넨 리 제독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나다 제독 말씀이십니까?”
드러나게 풀린 눈으로 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독배(毒杯) 들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망설이면서 케네스는 머리 속으로 리 제독에 대한 나름의 정보카드를 뒤적였다.
리 제독. 세상에는 나다 제독으로 더 알려진 자유행성연맹의 명장. 적들에게는 베이비 페이스의 살육자, 절망의 벽이라는 극한 저주와 공포의 대상으로. 아군에게는 승리보증수표이자 팩토리 유닛의 지배자라는 칭송을 받았던 희대의 명장.
이전 자유행성연맹의 개척자격인 슬레이어 초대 원수가 소수 병력으로 다수의 적들을 전격기습작전으로 혼란시키고 결정타를 가하는 전술의 일인자였다면 리 제독은 언제나 상대방을 압도하는 대규모의 병력운용으로 저항의지 자체를 말살시켜 버리는 특유의 용병술을 자랑했다. 혹자는 리 제독은 그저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는 것 이외의 다른 전략적 요소는 전무했다, 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리 제독의 전투 스타일에 대한 “거대한 흐름 속에 숨겨진 수많은 전략 가능성 중 취사선택의 탁월함”이라는 부의 지적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발언이었다. 거대병력이라는 강렬한 인상 뒤에 숨겨진 그의 날카롭고 시의 적절한 전략선택의 탁월함은 감히 우주최강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영웅이죠, 슬레이어 원수와 함께 자유행성연맹의 양대 산맥으로 남을......”
“그런데 지금 그 영웅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지?”
부의 반문에 케네스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위기에 닥칠 때마다 귀관의 어깨에 우리 연맹의 명운이 걸려있다, 라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그와 수십,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사지에 몰아놓고 전쟁이 끝나면 온갖 견제와 흠집잡기로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여기에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면에서는 제로에 가까웠던 리 제독 특유의 스타일도 언론이라는 배경과 잘 섞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함께 있었다.
결국 정년퇴임을 하면서 리 제독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그가 원하기도 했겠지만 그의 향후 입지를 그저 생존하는 화석 수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권력층과 그에 충성하는 언론들의 담합의 혐의도 상당히 존재했다.
부는 지금 그것을 따지는 것이리라. 케네스는 여지껏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그대로 비워버렸다. 식도부터 위장을 태우듯이 훑어내려가는 액체의 불쾌함이 그의 중추를 자극했다. 반사적으로 케네스는 손을 뻗어 향긋한 과육향을 풍기는 아보카도를 집어 삼켰다.
“1,300만의 인명을 전사시킨 것이 오로지 리 제독만의 책임인가? 평화유지와 안보확립이라는 미명하에 저그와 프로토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리 제독의 판단이었나? 또한 그 수 많은 전투 가운데 리 제독이 전권을 쥐고 전장을 지휘한 것이 몇 번인지 아는가? ”
부는 보기 드물게 상당히 취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케네스를 닦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부는 그 자신의 내면에 뭉쳐진 불만에 대한 항의를 내뱉는 중이었다.
“세 번이네, 단 세 번! 말이 되는가!, 리 제독이 참가한 서른 여덟 번의 전쟁 가운데 불과 세 번이야. 제독으로 승진한 후로만 따져도 스물 두 번 가운데 세 번이라니.....젠장...지나가던 개가 디스크 걸릴 일이지.....젠장.....”
알콜의 흥분작용이 부의 입을 거칠게 하고 있었다, 조금만 두고 보자면 또 “개나리”나“십장생”류의 거친 말이 터져 나올까 싶어 케네스는 얼른 술잔을 부에게 건넸다.
“한잔 받으시죠^^;;;;”
부는 드러나게 초점이 풀린 눈으로 케네스가 내미는 잔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한결 풀이 죽은 음성으로 입을 연다.
“소름이 끼쳐, 짜증이 나, 입맛이 더러워져.....슬레이어 원수나 리 제독의 말년을 생각하면....영웅이니, 구국의 화신이니 칭송할 때는 언제고.....늙고 자리에서 물러나니.....”
울컥, 하는 심정이 드는 모양이다. 발작적으로 술잔을 비우더니 이번에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케네스에게 잔을 건네며 소리친다.
“오늘 밤 우리 이거 마시고 죽자!!!”
전...이미 죽어가고 있습니다.....혈관에 스며드는 알콜의 독기를 느끼며 케네스는 드러나게 풀린 눈으로 부의 흐려지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점점 기억과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 흐려짐 사이로 느닷없는 부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다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대 슬픈 눈에 어리는 이슬처럼 맑은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 들어와 푸른 샘으로 솟아나리니

그대 여린 입술 사이로 바람처럼 스친 미소가
나의 넋을 휘감아 도는 불꽃이 되어 타오르리니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빈 바다를 헤매는 내게 살아야할 단 하나의 이유되어

사랑이란 소망의 섬 그 기슭에 다가갈 수 있다면
사랑이란 약속의 땅 그 곳에 깃들 수만 있다면

그대 붉은 입술 다가와 화살처럼 스친 입맞춤
나의 넋을 앗아가버린 상처되어 남아있는데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떠나버린 나의 사랑아
꽃상여에 그대 보내며 살아야할 이유마저 없으니

사랑이란 절망의 벽 울부짖는 통곡마저 갇힌 채
사랑이란 배반의 강 간절한 언약마저 버리고

*
사랑이여 불멸의 빛 거짓 없는 순종으로 그대를
사랑이여 사랑이여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 조용필<슬픈 베아트리체>


무슨 노래가 이리 처절하고 우울하냐....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버티며 마지막으로 케네스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

창가에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에 베아트리체는 눈을 뜬다. 투명하고 밝은 햇살이 열어젖힌 커튼 사이로 바닥 카펫에 환한 조명으로 드리워져 있다.
조금은 늦게 일어난 듯 싶어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예순이 넘었지만 여지껏 아침식사 준비를 거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그 전통 아닌 전통이 깨어지는 듯 싶었다.
부가 놓고 간 책, 아직은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 리 제독의 저작물. 두근거리는 가슴과 버석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한 줄 한 줄 새겨 읽느라 새벽녘에야 잠든 여파였다.
문학소녀도 아닌 처지에 무슨......
쓴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방을 나서려 문을 여는 순간,
“행복한 아침!!!”
카트린느의 맑고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와 함께 눈 앞에 들이밀어지는 밀크커피와 크로상의 향기.
“할머니 늦잠 자느라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
장난스레 볼을 부풀리다가 이내 까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카트린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베아트리체는 저도 모르게 쿡! 웃음을 터트린다.
“이 커피를 끓이고 크로상을 굽고, 이걸 진짜 다 했단 말이니?”
“그럼요......”
호기롭게 말을 하려다 말꼬리를 흐리며 카트린느는 혀를 쑥 빼밀며 웃음을 짓는다.
"사실은 손님이 오셨는데.....할머니 아직 주무신다고 하니까....그럼 아침은? 하시면서 만들어 주신거예요 ....."
손님이 와 계신다구? 베아트리체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또록또록한 눈망울을 굴리는 카트린느를 바라봤다. 늦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준비 못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은 시간, 누군가가 찾아오기엔 너무도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손님이라구?
베아트리체는 얼른 카트린느에게 접시를 받아 옆 테이블에 놓아두고 거실로 걸음을 서둘렀다. 설마 그 분이? 잠깐 그녀의 볼이 살짝 물드는 것도 같다.

“베아트리체 여사님?”
“당신은?”  
스물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환한 웃음을 보이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젊은 여인이다. 흑단(黑檀)처럼 검고 치렁치렁한 머릿결이 베아트리체의 눈에 먼저 다가왔다. 아직은 순수함이 가득한 눈망울, 건강한 혈색의 볼, 그리고 생기 넘치는 입술.
“여사님, 저는 마리아 수비나라고 합니다. 현재는 리 제독님의 수행비서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침 일찍 결례인줄 알면서도 방문하게 된 점을 먼저 사과드립니다.”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톡톡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싱그러운 외모와는 달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만만찮은 지적 수준과 상당한 예의범절을 갖추었음을 느끼게 한다.
마리아 수비나라는 방문자의 이름보다는 리 제독의 이름이 먼저 베아트리체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리의 수행비서라고? (자유행성연맹에서는 장성급 이하 군관이 정년퇴직시 정부 부담으로 일인의 수행비서를 파견하는 제도가 있다. 물론 노후생활의 편의를 보아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정치세력화 하기 쉬운 군부의 고위간부들을 감시한다는 내면의 목적이 짐작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베아트리체는 내면에서 바삐 뛰노는 심장의 박동을 애써 제어하며 겉으로는 은은한 미소를 보이며 질문했다. 수비나는 잠깐 금테안경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리 제독님께서 마리나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녹취해오라고 하셨습니다.”
“마리나?”
잠깐이지만 베아트리체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혀졌다. 그리고 몸이 비틀거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잽싸게 다가온 수비나의 부축으로 쓰러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카트린느가 놀란 토끼눈으로 다가왔다.
“할머니 또 가슴이 아파?”
금방 커다란 눈물방울이 어리는 카트린느의 눈을 바라보며 베아트리체는 억지로나마 웃음을 지어보였다. 수비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다가온다.
“괜찮으세요?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니 괜찮아요. 잠시 아득해지려던 의식을 붙잡은 베아트리체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냥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그러니까 울지 말아라, 옷자락을 붙잡고 입술을 실룩거리는 카트린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수비나의 부축을 받아 테이블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으면서 베아트리체는 다시금 수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 제독님께서 그렇게만 말씀하셨나요?”
뜻밖의 사태에 단정하기만 하던 수비나의 얼굴에도 얼마만큼의 음영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침착함은 잃지 않고 있었다.
“네....별 다른 이야기는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가서 그리 말씀하시면 그쪽에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그랬군요. 베아트리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삼십여년을 그렇게 버텨온 기억처럼 리 제독의 얼굴과, 그리고..... 그리움이자 끝내 극복할 수 없을 상처의 근원인 그 모습, 마리나의 얼굴이 버릇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우선, 앉으세요.”
눈을 뜬 베아트리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수비나에게 곁에 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수비나가 자리에 앉자. 아직도 물기가 어린 눈으로도 용케 카트린느가 짙은 향기를 풍기는 커피잔을 수비나 앞에 놓는다. 고마워요 아가씨. 수비나가 눈을 찡긋, 하며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풋! 하고 웃음을 빼무는 카트린느.
“카트린느, 할머니는 손님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놀으렴.”
괜찮겠어요? 아까의 소동이 마음에 걸리는 듯 카트린느는 둥그런 눈으로 한참 베아트리체를 들여다본다. 괜찮아 할머니는. 베아트리체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마지못해, 천천히 거실을 빠져나간다.
“손녀랑 단 두 분이 사시는가 봐요?”
“사실 딸이랍니다.”
딸이요? 수비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베아트리체 여사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후후.....그렇게 놀라시는게 당연하겠죠. 사실 입양한 아이랍니다. 그런데 딸이라고 하면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신나라 할까봐, 그냥 사람들에겐 손녀라고 해두었죠.”
그렇군요, 수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었군요. 당신과 마리나가 이야기했던 사람이. 베아트리체는 파드득 내면에서 솟구치는 떨림을 진정시키려 드러나지 않게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리 제독이 수비나라는 이 아가씨를 자신에게 보낸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법.
리 제독은 아무래도 그 때의 이야기를 세상에 밝히기로 마음먹은 듯 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용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수비나와 자신의 곁에 리 제독도 함께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과, 아직도 자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는 힘들다는 것에 대한 서러움이 아프게 다가올 뿐이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요?”
베아트리체는 부러 수비나를 정시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가에 비치는 수비나의 얼굴은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기억은 빠른 속도로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가로질러, 2014년 5월, 그 지옥에서 보낸 시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nding Song

 As Time Goes By -윤미래(T)

마지못해 살아가겠지 너 없이도
매일 아침 이렇게 일어나
밤새 조금씩 더 무뎌져버린 기억 속에서
애써 너의 얼굴을 꺼내어 보겠지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느린 아픔을 주는지
힘든 하루 속에도 늘 니 생각뿐인 난 눈물마저도 말라가는데

*As Time Goes By 난 그게 두려운 걸
니 안에서 나의 모든게 없던 일이 될까봐
눈 감으면 늘 선명하던 니가 어느 순간 사라질까봐
정말 겁이 나는 걸

이별이란 서로에게 지워지는 거라지만
많은 사람 속에도 늘 니 걱정뿐인 난 시간마저도 붙잡고 싶은데

*Repeat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될까봐 내가 없는 세상이 너는 괜찮은건지
너에게 잊을만한 추억일 뿐인지
참으려 애를 써도 늘 보고픈 나는
니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데

You Are The One As Time Goes By
난 여기 있어줄게 셀 수 없는 밤이 지나도
사랑했던 그대로 혹시라도 너 돌아오게 되면 단 한번에 나를 찾을 수 있게

As Time Goes By

(3부로 이어집니다)

기획: 정지현/ 해원
제작: 구슬게임넷
원작: 은하영웅전설
각색/각본/연출: 몽패랜덤
조연출: 몽땅이기는랜덤-_-;;;;

출연

마리아 수비나: 수빈이님 (제....제발 용...용서를;;;;;)


* 몽패랜덤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18 20:41)

04-09-14 03:21:50
  지나가는 비     04-09-14  
 관람 비..대..댓글로 글을 다는 저를 요..용서를..  
  낡은운동화     04-09-14  
 ㅜㅜ 눈물나요~~  
  phoenix     04-09-14  
 몽땅이기는랜덤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평생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각설하고, 조용필씨의 슬픈 베아트리체는 물빛노을님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윤열선수와 관련된 분들의 이름 찾는 재미도 쏠쏠하구요.
몽패대사님!!! 존경하옵니다.  
  꽃단장메딕     04-09-14  
 한번 읽어서는 이글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것 같아요.
두번 세번 읽어나가면서 못찾고 지냥 지나친 뽀인트들을 다시 찾는 재미가 쏠쏠하군요.
저도 몽패대사님을 존경합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finethanx     04-09-15  
 책은!!!!!! 책은 언제 나오나요! 몽패님!!!!!!!!!!! ㅠ0ㅠbbb

'리 제독'이란 단어가 왜 이리 슬프게 다가오는 겁니까.
밤에봐서 더 그런가...궁시렁.....ㅠ_ㅠ

결말이 비극은 아니겠지요? 비극은 아니되옵니다!!!!!! 현실과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구요. 쿨쩍..  
  VIVID     04-09-15  
 비님의 몇몇 댓글보고 한참 웃었네요;;;
몽패님글은 꽤 장문이라(구세대라 장문의 글에 별로 압박을 못느낌에도 불구하고)
밤에, 호흡을 고르고. 맑은 정신으로 읽게 된답니다.
이번 작품은 속도가 꽤 빠르시네용.
윤열이 이모님들 다 출연?ㅎㅎ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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