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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1. 처음에, 그것은 아주 낡은 책이었다.

박정석 선수와 박성준 선수의 결승전이 있는 날, 나는 우연히 나를 찾아온 후배에게 한 권의 낡은 서적을 선물 받았다. 아주 오래된, 그래서 퀴퀴한 종이 상하는 냄새와 용케 좀이 먹지 않도록 강하게 먹인 듯한 향료의 냄새가 어우러진 참으로 애매한-_-;;; 향내가 감싸 도는 책이었다.
“퀴즈 진품명품에 나가보지 그러냐?”
내 실없는 농담에 후배 녀석은 퍼석한 웃음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학년이니 말 놓아도 되지? 라며 담배를 꼬나물던, 시건방진 여자 후배. 그러나 이제 이 녀석은 내 말에 항상 저렇게 보는 사람도 아릿하게 만드는 퍼석퍼석한 웃음을 보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 책을 받고 한 삼십여분 정도를 냉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한가함이 남아도는 나는, 무척이나 바쁘다는 그녀의 저녁 제의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나갈 때와는 달리 내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여전히 성(聖)과 속(俗)을 오가는 복잡한 향내를 풍기는 책이 담겨 있었다. 아주 밑지지는 않은 하루군, 하며 나는 버스에 덜컹거리며 반은 삼키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녀는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직도......그러나 나는 이내 버스 좌석 등받이에 한껏 몸을 묻으며 속으로만 말했다.
‘될 일이라면 이렇게 서로 난리내며 속 긁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금 떠오르려는 지난 날, 그녀의 사악한 마법을 이겨내려 나는 가방 속의 책을 꺼내들었다. 옆에 앉았던 고등학생 녀석이 불쑥 솟아오르는 정체불명의 냄새에 난감-_-;;;한 표정을 떠올렸다.
‘영문학 공부한다는 녀석이 왜 이런 옛날 책을 뒤지고 다니는 건지.....’
나는 좀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금만 어긋나면 낙장되기 쉬운 표지를 넘겼다. 속지에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표지에 적혀있는 제목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_-)

念慇愛人(숨어버린 애인을 그리워한다)
著 碧嘯裙

  벽소군이라.....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_-aaaaaa
  기억이 안난다-_-;;;;

이거 혹시 한문소설 아니야? 라며 적잖게 걱정이 들었던 나는 이내 다음 장을 넘기고 가벼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천만다행히 국문으로 쓰여진 책이었다. 소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놀며 자며 대강대강 다녔던 내 국문학 지식의 범위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책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웬수냐?”
발신자를 확인하고 나는 좀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래요, 그러면서 또 주변 공기가 말라 부스러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핸드폰 단말기를 통해 울려퍼졌다.
  무슨 일?
  그 책 잘 읽어 보세요
  왜 보물지도라도 숨겨져 있대?
  그럴지도 모르죠....
또 다시 번지는 웃음소리.
  쭈아.....그럼 한번 열심히 읽어볼게....참...언제 또 출국해...
  내일 모레요.
갑자기 정색을 하며 굳어지는 표정이 그대로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그래....
나 역시 갑자기 어색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참으로 바쁜 여자가 모처럼 틈을 내 비행기를 타고 반나절을 날아왔던 것이다. 미안하다기 보다는 녀석을 향한 소금기가 짜게 배어들고 있었다.
아무튼 모처럼 왔으니까 친구들이라도 몇 명보고 즐겁게 지내다 가라...
알았어요..... 그리고 ....
뭐?
아니에요.....그럼 조심히....

통화는 끝났다. 아마 자신이 떠날 때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려다 만 듯 싶었다. 인천은 너무 멀어....김포공항도 데어 죽을 뻔 했는데 -_-;;;; 질척해지는 마음을 말리려 뚱한 생각을 하다가 퍼뜩 얼마 전 보았던 후배 녀석의 영화 왜 이리 구리지-_-;;;라는 비난이 시종했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떠올랐다.
  너는 내 미래가 아니야.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조금은 몽롱해진 시야 속으로 두어 장이 열렸을 뿐인 책이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마침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2. 떠난 자와 남은 자

……이제 더 이상 늙고 병들어 그나마 간직한 기억이 바스라지기 전에, 비로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자 마음을 먹는다.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들의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의 내력 한구석 한구석마다 혈루(血淚)없이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이리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에 망설임을 매달게 된 듯 싶다.
내 이름은 강민, 호는 동강. 한때 고물토수(鼓芴土獸-땅위의 모든 짐승들이 북을 치며 황홀해 함)라는 이름을 얻었던 중원의 마술사이자 몽상가로 알려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기록하되, 필자는 따로 있다. 碧嘯裙. 언제나 내겐 등만 보이던 여자. 그토록 삶에서 한번만 보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한 웃음을 한번도 내게는 보여주지 않은 여자. 내 잘못이 아니라 주변의 광태(狂態)로 인해 내게서 마음을 지워버린 여자.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오르게 된다. 서정 박정석. 부루토수 문하의 절대쌍교라 불리워졌던 내 전우이자 호적수. 그리고 연적.
그들은 떠나고 나는 남았다. 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떠난 무정한 두 사람에 대한 내 회한과 그들이 남긴 족적이 세월의 흐름 속에 자칫 사라지기 전, 서툰 손길로나마 다시 새겨넣어야 하는 것.
이제, 여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힘겹게 새겨놓는다. 그러나 나는 그저 그들의 흔적에 어지러운 손길만을 보탤 뿐, 모든 내용은 옹감네 무협비록『질로토 쟁패전 비사』와 벽소군의 저서『念慇愛人』에 기대고 있다.
-序跋, 동강(東彊) 강민-

그리고 이어지는 한 편의 옛 노래.

     靜女

靜女其姝   귀여운 그 아가씨
俟我於城隅 난 기다렸지 성 모퉁이에서
愛而不見   사랑하나 보이지 않아
搔首蜘躊   머리 긁으며 머뭇거렸어

靜女其孌   귀여운 그 아가씨
貽我彤管   붉은 피리를 내게 주었지
彤管有煒   붉은 피리 고운 것은
說懌女美   그녀의 얼굴 아름답기 때문이지

自牧歸苐   들에서 들꽃싹 하나 내게 주었지
洵美且異   참으로 아름답고 또한 신비했네
匪女之爲美 꽃싹이 그렇게 고움이 아니라,
美人之貽   고운 님이 주었으니 이리 고울 수 밖에
  
- 서정 박정석이 벽소군에게 보낸 연서 중 일부(원래는 시경의 작품 가운데 하나임;;;;)          

책의 내용은 드디어 본격적인 시작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현대인들에게 어색하고 읽기 어려운 고문 문어체의 표현과 복잡난삽한 내용을 나름대로 현대식 표현과 간략한 편집을 통해 옮기어 적어본다. 혹 스톤헤드인-_- 관계로 의미전달이나 이해측면에서 잘못 전달되는 일이 생길까 두렵다.
아무튼 이제부턴 본격적인 이 책의 내용이다.

3. 불길한 조짐

파란만장 나도현은 겨우 의식을 찾은 듯 쓰러져 있던 몸을 비틀비틀 일으켰다. 비록 승부에는 졌지만 한때 자신의 사형이자 동료였던 사람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한 듯 싶었다.
언제나 잔잔한 미소가 맴돌던 도현의 얼굴은 고통을 참는 땀방울과 패배에 대한 치욕이 얽혀 일그러져 있었다.
“내....내가 졌소.....”
비통을 극한, 최후의 힘 한방울을 짜내며 마침내 도현의 입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떨어졌다. 재균 선사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정 박정석은 무표정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주저앉는 옛 동료인 나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불나주 변길섭은 알고 있었다. 지금 서정 박정석의 내면에 얼마나 모진 풍파가 일고 있는지를. 거의 마비되어있는 변길섭의 얼굴 근육 일부가 꿈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정은 서서히 도현에게 다가갔다. 서정이 다가옴을 알자 고개를 드는 도현의 눈가엔 이미 눈물이 맺혀져 있었다. 가만, 입술을 짓깨물며 서정은 짐짓 무표정하게 입을 연다.
“수고하셨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 승부를 결하는 자리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어울릴 리가 있겠습니까.”
도현이 서정이 내민 손을 잡아 일어서며 말한다. 어른이 다 되었구나. 서정은 모처럼 입가에 실금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같이 있을 때만 해도 철없고 산만한 친구였는데......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재균 선사와 도경 사형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피어오르던 웃음을 걷고 정중히 예를 표한다.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장로님께서도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대광사를 떠나 거이타부의 무장으로 출사하던 날. 불나주 변길섭이 재균 선사에게 대광사에 온 이래 가장 많은 말과 다양한 표정을 보였을 때부터 서정은 말을 잃었고 표정을 잃었다. 떠나면서 절대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다섯 걸음 만에, 혹은 두 세 걸음 만에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한했던가.
또 정을 떼려면 모질게 떼라는 가르침을 전하던 재균 선사 역시 고집스럽게 뒤돌아선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얼마나 쇠못을 때려박는 아픔이었던가.
가끔씩 꿈에도 나타나던 그리운 얼굴들. 그러나 정작 눈 앞에 마주한 그들은, 자신으로 인해 결승진출이 또 좌절된 경쟁문하의 식구들이었다.
도경 사형도, 재균 선사도, 그리고 동문사형사제들인 박경락 김선기 유인봉 박영민들도 서정이 예를 표했을 때 가만 목례를 했을 뿐 서정이 돌아서서 거이타부 무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돌아갈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역시 서정이군....”
“그러나 파란만장도 많이 성장했군 자네를 이렇게 애먹이다니”
거이타부 무관들의 대장격인 얼노우 홍진호와 瑪潾(마노처럼 맑은 귀공자) 김정민이 환히 웃으며 승리자 박정석을 맞이한다.
“수고하셨수다래....” 볼다구 조용호가 볼에 불룩 바람을 넣으며 푸념인지 부러움인지 애매한 말을 하자
“-_-;;;” 변길섭이 눈으로 말한다.
서정은 동료들의 축하에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이렇다 할 말이나 표정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음 경기를 생각하고 있었고, 또 아무도 짐작 못할 또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옹감네를 둘러싸고 있는 큰 호수인 井湖煐(정호영-우물모양의 호수, 일출 때 빛이 비치는 모습은 장관, 게임아이 1500점 이하는 절대 이해 못함;;;;)에는 苡孤島(이고도-질경이풀만이 자라는 섬)가 자리잡고 있다. 질경이 풀만이 자랄 수 있는 척박한 섬. 그러나 이 섬은 언제부턴가 옹감네에 사는 총각들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잔잔한 정호영의 수면(다만 보창 이윤열이 억울한 일을 당할때면 일진광풍이 일어난다고 한다)을 가르며 동강 강민이 타고 있는 배가 나아가고 있었다. 뱃머리에 앉은 동강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의 여유작작한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 쫒기듯 동강은 불안정하게 손을 쓰다듬다가 얼굴을 매만지는 등 진득하게 자리에 배겨앉지를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뱃머리가 채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동강은 펄쩍 뱃전에서 뛰어내려 얉은 수면을 철벅거리며 뛰어간다. 한참을 달리던 그가 멎은 곳은 그나마 바위 틈에서 지하수가 솟아나고 몇 그루 나무가 드리워져 질경이풀만 가득하고 여름에는 짙은 볕이 땅을 데우는 이곳 이고도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거처할만한 장소다. 그리고 간소하지만 나름대로 정갈한 느낌이 드는 가옥이 서 있다.
동강 강민은 잠시 문 앞에 서서 가쁜 호흡을 다스리고는
“낭자 계시오?” 라고 입을 연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 집안. 다시 한번 동강이 입을 열려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지현 츠자가 얼굴을 내민다.
“또 오셨군요+_+;;;”
지현 츠자의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어린다. 어릴 때부터 종종 목 아픔 증세가 있어 호흡기 질환에 좋다는 정호영 호수의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요양차 유람차-_-;;;; 와 있는 사람이었다, 낭자나 처자라는 말 대신 자신이 사는 지방의 고유어인 츠자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벽소군 낭자는 아니 계시오?”
  “해...아니 벽소군이는 아마 해변가로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이미 동강의 시선은 지현 츠자를 떠나 해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
섬을 반이나 돌고서야 동강은 겨우 벽소군이 해변가 바위에 앉아 정호영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반가움에 동강이 말을 건네고 옆에 서기까지 그녀의 입에서는 그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또한 처음에 한번 동강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을 뿐 다시 호수 쪽으로 향한 얼굴은 요지부동이다.
동강은 좀처럼 자신에게 정면을 허용하지 않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언제부턴가 이 여자는 자신에게 좀처럼 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시선이 언제나 서정에게 머무는 것과 같은 때였음을 동강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벽소군의 시선과 말을 잃은 후 동강은 어떤 것을 해도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토록 자신을 흥분시켰던 호적수들과의 일합도, 혹독한 수련 뒤에 시원하게 들이마시는 농주의 진한 맛도, 밤이 늦도록 머릿속에서 춤추고 하늘을 날아다니게 하는 새로운 초식에 대한 연구도, 정작 그녀의 시선을 잃어버리자 그에겐 어떠한 효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번, 동강이 거이타부로 옮기게 되었다는, 그래서 서정과 함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잠깐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내 그 고개는 다시 돌려졌고, 이후론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안타깝기보다는 동강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천하를 농단할 자신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에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언제나 차디찬 침묵과 기대할 것 없는 응대만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틈만 생기면 이곳으로 다가오곤 했다. 한사코.
벽소군의 옆 얼굴은 막 저물기 시작하는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붉은 얼굴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과 곧게 닫힌 입술로 인해 조금의 온기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리 마음이 매여서....동강 강민은 씁쓸하게 웃음을 머금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서정이 파란만장 나도현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
적어도 서정의 소식만은 반응을 얻을 줄 알았던 동강으로서는 또 한번의 낭패를 더한 듯한 느낌이었다. 도무지 벽소군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찾아낼 수 없었다. 눈썹의 위치, 입술의 주름까지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 소식만은 기뻐하시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기뻐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열린 그녀의 입술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차갑고 귀기어린 추궁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
“……”
잠시의 균열이었던가, 동강이 말을 잃자, 이내 벽소군은 언제나처럼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장이나 무술대회에서는 눈 앞에서 칼 끝이 춤을 추고 머리 위로 표창들이 지나가도 태연자약한 나인데 고작 이 여인의 한 마디에 이렇게 무너지는 나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그러면서 동강의 뇌리에 서정의 얼굴이 스쳐갔다. 여느 때처럼 늘 무심한 듯한 얼굴, 그 무표정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귀골의 아름다움. 유난히 서민적인 그의 일상행보 등이 느닷없이 동강의 뇌리 속에 쏟아져 내렸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
동강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해도 이미 돌아선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동강은 또 한번의 쓸쓸함을 가슴에 보태며 뒤돌아섰다. 잠시 걸어가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녀 벽소군은 바위처럼 그에게 자신의 등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선 동강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젠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버려두다시피 놓아둔 배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점석아......
벽소군은 한 소년의 이름을 불러본다. 어린 시절, 유난히 환한 웃음과 터질 듯한 허벅지로 동네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던 두서너 살 위 형들에게도 달려들만큼 정의감이 강했던 소년을. 그러면서도 자신이 울음을 터트리면 어찌할 줄 모르며 얼굴 붉히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와~~내사 몬 살겠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곤 하던 소년을. 선이 굵고 균형잡힌 얼굴이었지만 다장일단이라 할까 얼굴에 점이 많아 친한 친구들은 그를 점석아 점석아 하며 놀림 반 애정 반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소년은 유독 그녀에게는 민감했다, 다른 아이들이 점석아 점석아 부를때면 가끔씩 눈을 부라리거나 무시해버릴 때도 있었지만 그녀가 울면서(소년을 찾을때는 대부분 울면서였기도 했지만;;;) 점석아!를 외치면 눈을 쫑긋 뜨고 먼 거리라도 내질러 달려오곤 했다.
그리고 싸움이 무서워 구석에서 울고 있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소년이었다.
“울지 마.....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너를 항상 지켜줄게.....걱정 마....”
그러면서 소년은 큼직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고 그제서야 벽소군은 방긋 웃으며 나란히 손을 잡고 길을 누비곤 했었다. 정말이지 둘이 함께 있을 땐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벽소군은 막 치밀어오르려는 눈물을 이를 앙다물며 버텨낸다. 지금 눈물이 터진다면 난 또 그의 곁으로 달려가게 되고 말거야. 그건 안돼......정말.....
  “안 들어오시고 뭐하십니까?”
지현츠자가 걱정이 되었는지 벽소군에게 다가온다. 잠시 지현을 바라보던 벽소군,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연다.
“지현아....니 내일 옹감네 가라”
무슨 말이냐는 듯 지현 츠자가 눈을 쫑긋 뜬다
“니가 가라 옹감네-_-;;;”
“지현이 니 마이 컸다-_-++++”
벽소군의 몸을 휘도는 살기에 지현 츠자는 움찔한다, 잠시 후 눈물을 머금으며 -_ㅠ;;;;
“알아써....-_ㅠ”
괜스레 일만 떠맡게 된 지현 츠자 서운한 표정으로 엄한 호구남매의 도움 안 되는 오빠 몽패를 타박하며 자리를 뜬다.

다시 홀로 남은 벽소군, 이제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서 드문 드문 빛을 심는 별들을 바라본다.
별빛이 눈에 넘치는 듯 금방 쏟아져 나오는 물 기운.
입술을 앙다물어도, 가슴을 방망이질쳐도 한번 터져 나온 물줄기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기어이, 벽소군의 입에서 참다 참다, 한껏 키워져버린 통곡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오겡끼 데스까!!!!!!(잘 지내시지요?)”
오겡끼 데스까 호수와 산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화답한다.
“와따시와 겡끼데쓰!!!!!!!(저도 잘 있습니다!)”
와따시와 겡끼데쓰 와따시와..... 이번에도 산과 호수들이 부지런히 미소를 보이며 대답한다.
그러나 그 많은 목소리 중에 정작 벽소군이 듣고 싶어하는 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그녀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들고 있었다.

<내일 이어집니다>

1. 이번 소설은 of 해원님, for 해원님,  by 해원님을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때문에 해원님의 반대의견시 무조건 삭제입니다;;;;)
2, 자꾸 회원분들을 등장시키다 보니 때로는 어이없거나 자칫 불괘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런 경우 있으시면 가차없이 신고해 주십시오 자진 구속;;;하겠습니다
3, 이번 소설은 그리 길게 진행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워낙 연생마인전에 데어서;;; ㅜ_ㅜ) 아무튼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없음을 알려드립니다;;;
4. 구슬과 성준동 (운영진분들에게 허락받아야 함;;;고로 안된다는 뜻 ㅠ_ㅠ)이외에 다른 곳의 퍼감을 일절 금지합니다;;;;
5, 자꾸 마지막 부분에 너무 개그모드로(안 웃긴;;;)간 것같아 이상하군요 ㅜ_ㅜ
* 몽패랜덤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16 00:56)

04-08-04 20:11:36
  연*^^*     04-08-04  
 우아아아....또 다른 소설인거 좋은데...경락해연몽은 포기십니까?
하긴....그건 시작부터 끝날줄 모르는 엔드리스스토리로 보였당께.
여하간 몽패님 글 자꾸 지우지 마세요. 지난번에 글 지운건 보고서
아우...이렇게 좋은 글을 왜 지우나..싶더라니깐요.  
  파란마녀     04-08-04  
 -0-/ 언제나 즐거움을 주시는 몽패님이십니다..^^  
  VIVID     04-08-04  
 연재를 끝내신지 얼만 안되셨는데 또 새로운 작품을!!!!!+_+
동강의 벽소군을 향한 외사랑이 너무 가슴아프군요.
그런데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한 벽소군은 당췌 상상이 안되는걸요?ㅎㅎ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일 꼭 후편 연제 부탁드립니다. 꼭요.  
  낡은운동화     04-08-04  
 벽소군.......ㅠㅠ 정녕....내가 아는 그분?^_______^  
  phoenix     04-08-04  
 후훗..... 몽패대사님의 새로운 작품 연재이옵니까?
소녀 오늘 밤늦게 피씨방에 잠시 부유하다 느낀 이 감동을 어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소녀 걱정이 되는 것은......
지난 연생마인전처럼 내일 올리신다면서 안 올리시고 다음으로 미뤄지는 것일 뿐...
부디.. 이번에는 날마다 하나씩 올려주시옵소서..


덧붙임..... 제 엠에쎈으로 질로토 쟁패전 비사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옵니까......  
  꽃단장메딕     04-08-05  
 벽소군양의 퉁퉁 부은 눈과 웃다가 딱걸린 제 두눈이 마주친 순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그날 이후 지금까지 눈치만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몽패님의 이런 멋진 글도 선물로 받고,
오호대장군 가운데 4명이 한꺼번에 옹겜넷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지금은 다시 해피모드로 접어들지 않으셨을까 안심하게 된다는...
(몽패님/ 도대체 이런 글 한편 쓰는데 어느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해원     04-08-0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몽패님.. 철없는 저를 이렇게 달래주시고 얼러주시니 감사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제가 이 글 보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실꺼에요! ^_^

피시방 한 구석에서 입꼬리를 귀에 걸고서 한참을 있었다니까요.. ^^;  
  해원     04-08-05  
 아 그리고 메딕님.
ㅎ_ㅎ 메딕님의 사탕 잘 받았습니다. ^^
사탕을 쪽쪽 빨면서 우울함을 달랬어요. 감사! ^^ (물론 멋진 부채도!)

제 오호대장군 중 네명이 스타리그 갔지만 전 마치 -_- 우산장수 짚신장수 어머니처럼 왜이리 걱정만 되는 건지.. (못올라온 경락이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겠어요. ^^;  
  거짓말     0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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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미소밖에는...^^)  


 
  Bar Sur   칭찬이 아니더라도 솔직한 감상평을 남겨주세요.  [1]  2003/09/20 2961
  정지현   소설을 올리는 곳입니다.  [7]  2003/08/23 2847
72 몽패랜덤   13번째 전사-『그래서 그들은 우주로 갔다』(1부)  [3]  2005/09/03 2360
71 마술사   [엽기코믹] 나비효과    2005/09/24 2614
70 몽패랜덤   [살짝 맛보기;;;;;] 13번째 전사-『그래서 그들은 우주로 갔다』-프롤로그  [8]  2005/08/30 2541
69 몽패랜덤   <황당예고>13번째 전사(戰士)-『그래서 그들은 우주로 갔다』  [6]  2005/08/28 3074
68 Let It Be   [완결 불가] The Last Star - No. 1  [7]  2004/09/01 2641
67 Let It Be   [완결 불가] The Last Star - No. 2  [1]  2004/09/07 2685
66 몽패랜덤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최종회  [6]  2004/08/11 2755
65 몽패랜덤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3  [5]  2004/08/10 2504
64 몽패랜덤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2>  [4]  2004/08/06 2583
몽패랜덤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9]  2004/08/04 2615
62 몽패랜덤   종극연생마인전(終極嚥生魔人傳)-4부  [8]  2004/07/27 2713
61 몽패랜덤   종극연생마인전(終極嚥生魔人傳) 최종회(완결)  [10]  2004/07/30 2734
60 몽패랜덤   종극연생마인전(終極嚥生魔人傳) 최종회 PART1  [8]  2004/07/30 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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