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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최종회
梨花에 月白하고-속 동강서정(續 東彊西征)
                       최종회    

8.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

해사한 달빛이 고스란히 내려앉는 보름달 밤.
그러나 거이타부의 정원에서는 두 사람의 날카로운 안광이 달빛을 지우고, 바람의 소리를 지우고, 분분히 날리는 이화의 순백을 지우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서정을 지키고 되찾으려는 벽소군.
원하지는 않지만 조직의 영속을 위해 마음 속에 묻어둔 사랑이자 친우의 애인과 대적해야 하는 동강.
마음은 둘다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단련된 무공의 내성이 짐짓 그들의 표정을 차디차게 얼리고 여기저기 부딪혀 비명을 지르는 마음을 추스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힘겹게.
틈을 보이면 바로 죽음이다.
동강은 벽소군이 36인 살수계의 일인자임을 재삼 자각했다. 살수들은 상대의 목숨을 꺼내쥐기 위해서는 자신의 살을 내놓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또한 그렇기에 그들은 일격필살의 한타 만을 노려야 했다. 일격에 필살내지는 치명상을 입혀야만 그들의 목숨보다도 중한 임무수행을 달성할 수 있기에.
어찌되었든 벽소군에게 기회를 내주어서는 안 되었다. 동강과 벽소군의 주변으로 다시 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앞서 정문 쪽에서 겪은 일과 김정민, 홍진호 양대 용장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서인지 그들은 주변에서 창검을 번득이며 변죽만 올릴 뿐 감히 끼어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다.  
모르는 이들이 볼 때는 지리한 대치전이었으나 실상은 두 사람의 측량 못할 무공을 불태우고 기공을 소진하는 치열한 혼전이었다. 동강은 한때는 소원이었으되 비원을 벗어나지 못한, 이제는 생사를 결해야 할지도 모르는 적수로서 만나야 하는 기이한 인연을 탄식하면서도 자신의 이름과 거이타부라는 이 단체의 명망을 위해서라도 결코 꺾여서는 안된다는 다짐의 이중고를 여기에 더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왜 하필 당신인가요?”
얼음처럼 굳어있는 얼굴과 푸릇푸릇 긴장을 이기지 못해 메말라가는 입술로 벽소군이 입을 연다.
  “지금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오......”
솔직히 나도 하늘을 원망하오. 동강은 푸드득거리는 마음의 한끝을 애써 부여잡았다. 칼을 쥔 자신의 손에진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부디...이 검이 저 여인의 몸 어느 한 구석이라도 다치게 하는 일이 없기를.
그렇게 대치하고 있는 사이, 홍진호와 김정민을 비롯 조용호와 정수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수염의 얼굴을 보자 벽소군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며 거센 물살처럼 그녀의 몸이 튕겨나갔다.
챙!
칼날이 부딪히며 불꽃이 파르륵 흩어진다. 동강이 어느틈엔가 정면으로 벽소군의 칼을 받아내고 있었다. 벽소군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처음으로 피어올랐다.
“정말 이러셔야 하시겠습니까?”
입술 끝이 떨리는 것을 동강은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타도해야 할 적을 도리어 역성드는 내 모습에 실망과 노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 매인 자입니다. 당신은 그렇기에 적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토록 당신이 저에게 포악을 떨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동강은 입술 아래까지 새어나온 탄식을 쓰게 되씹어 넘겼다. 위산보다도 쓰라린 곤혹스러움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를 바라보던 정민이 손을 들어 무엇인가 신호를 보내려 한다. 그러나 이내 정수염에게 저지당한다. 의아한 눈빛으로 정수염을 바라보는 진호와 정민. 그러나 벽소군과 동강이 서로 칼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수염의 얼굴에는 이젠 흐릿한 미소조차도 드리워지고 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칼을 맞대고 얼굴을 가까이했던 벽소군이 돌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칼을 한 손으로 바꾸어 쥐고는 칼 끝을 늘어뜨리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달빛이 닿으며 금속성의 빛을 번득이는 칼날.
동강과 정수염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에 가까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비월참(飛月斬-날아서 달빛을 베는 검술, 36인 살수계의 궁극검법중 하나)!!”

……햇빛이 찬란하고 들꽃들이 휘황한 들판이다. 어딘지 낯이 익은 들판. 서정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그것이 대광사 뒤편에 자리 잡은 봉약산의 들판임을 알아챈다. 어린 시절, 뼈와 몸을 굵혀가며 뒹굴었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저편 옹달샘에서 목을 기울이고 물을 축이던 청노루 한 쌍이 쫑긋 귀를 세우며 환하게 웃는 서정을 구름빛 도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해는 마악 저물면서 온통 초록뿐인 산등성이에 잠시나마 이런저런 색상을 덧칠한다. 성미급한 별들 몇몇은 이미 하늘에 자취를 밝히는 조급증을 부리고 있다.
서정은 곁에 자리한 두터운 나무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발 앞의 풀밭 사이로 메뚜기들이 후닥닥 튀어 달아나고 어디선가는 매미가 결사적으로 울어대고 있다.
분명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정은 부러 머리를 흔들거나 의식을 돌이켜 깨어나려 하지 않았다. 너무도 지쳐있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작 꿈이라는 지나가면 사라질 뿐인 신기루라고 해도.  
  그러면서도 유별나게 꿈치고는 생생하다고 서정은 생각한다. 뺨과 코 끝을 스치는 신선한 봄바람의 꼬리도, 바람에 와사삭 누워버리는 풀이파리들의 연약한 속삭임도, 심지어 뱀이 바닥을 기어다니는 숨가쁜 호흡마저도 느껴질만큼 보이는 사물이 느껴지는 감촉이 와닿는 소리가 생생했다.
“왔구나.”
서정은 순간 얼어붙는다. 이 목소리, 이 잔잔한 떨림, 그리고 그 끝에 살짝 묻어나는 향기.
서정은 고개를 돌린다. 한껏 커진 그의 눈에 그토록 맺혀있던 여인의 얼굴이 그대로 박힌다.
  “다...당신은.....”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벽소군의 얼굴은 지금보다도 십여년 전의, 열 아홉의 앳된 복사꽃 열오름을 볼에 떠올리는 소녀의 얼굴이다. 정말 꿈이구나, 서정은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이 꿈이 죽음의 징조라고 해도 이런 징조는 골백번 환영하고 싶었다.
“할 이야기 있다고 불러놓고는 뭘 그렇게 토끼눈을 뜨고 쳐다보누.....내 얼굴에 뭐 묻었니...?”
입술이 웃자, 그대로 꽃이 된다-_-(꿈이야! 오직 꿈일뿐!!!). 기껏 많아야 두 세살 의 터울의 누나였지만 자신이나 경락, 도현이에겐 어머니처럼 넓은 품에, 은은한 웃음으로 손많이 타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누나.
그제서야 서정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십년 전 그날임을 깨닫는다. 그 날. 처음으로 무림대회에 나가 청소년부에서 차석을 차지하고 돌아온 날, 적어도 이제는 곁에 사람 한명쯤은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뼈속에 스며든 그날. 그리고.......
그때 나는 어떻게 했었던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와달라고 해놓고 이 나무 뒤에 숨어서 벽소군,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지. 그녀가 나와서는 또 어떻게 했던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마른 침 한번 삼키고, 배에 힘 꽉 주고 그녀를 뒤에서 덥석 끌어안지 않았던가. 깜짝 놀라 까무러칠 듯 앙탈을 내는 그녀에게 나는 뭐라고 했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하던 순간, 나는 무어라 했던가.
… 누나....아니...소군.....널 위해 살고 싶어졌어....나 혼자 즐겁고 기쁘기 보단 널 위해 살고 싶어졌어...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너를 위해 내가 책임지고 싶어졌어.....서투르지만.....사랑해...정말 사랑해....…
처음엔 성마른 목소리로 어서 손 풀라고 꾸짖던 벽소군도 서정의 고백에 한참을 멍하니 몸의 맥을 놓고 서있었다. 물론 나는 죽어라 그녀의 야윈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있었지.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무슨 장난기가 쓸데없이 번졌는지. 가빠지는 그녀의 호흡을 손으로 느끼다가, 얼핏 나무토막처럼 굳어가는 그녀의 몸에 느닷없는 장난기가 솟아오른 것은 정말 그때 내가 어려서였을까나.
뽀뽀해 주세요 앞 이빨이 똑 부러지도록/ 꼭 안아 주세요 허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웃음보는 그래서 터졌을 것이다. 어느 결엔가 나는 포옹을 풀고 배를 잡고 풀밭을 뒹굴었을 것이고 그녀 역시 그런 나를 발개진 얼굴로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푸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같이 풀밭을 뒹굴었었지. 나중엔 너무 웃어서 눈물이 쏟아질만큼, 정말 허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웃다가 나중에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들을 쏟아내 나중 어느 날 그 날 도대체 우리가 운 건지 웃은 건지를 놓고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웃다 울다 했었지. 만일 그때 지금을 알았더라면.....이리 서로 생지옥만을 찾아다니는 지금을 알았더라면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사랑한다고.....널 위해 살고 싶어진다고.....너를 위해 무엇인가 책임지고 싶어졌다고...그런 무책임한 말들을 정말 할 수 있었을까.

돌연, 서정은 눈을 떴다. 곁에서 지켜보던 길섭이 흔든 것도, 어떤 큰 소리가 주변에서 울린 것도 아니었는데 서정은 무엇엔가 소스라치듯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몹시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벽소군이 와 있어.....”
식은땀에 젖은 몸을 서정은 벌떡 일으킨다. 순간, 척추와 목뼈에 또 다시 강렬한 충격이 다가오지만 서정은 피가 비칠 정도로 입술을 앙다물며 갑주와 우수니치(紆髓旎熾)검을 집어든다. 길섭은 서정의 맹렬한 기세에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벽소군이 동강을 향해 달려가다가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 달빛을 받은 그녀의 검이 돌연 섬광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동강 역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고 두 사람이 허공에서 교차하는 순간, 그 광경을 목도하던 사람들은 벽소군의 검날이 빛을 발하는 순간, 달이 정확히 이등분으로 잘려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야 했다.
서로 엇갈리며 검을 교환한 두 사람은, 잠시 후 착지한다. 동강은 왼쪽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지지대를 잃은 자신의 왼쪽 팔이 뒹구는 것을 그는 냉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린다.
벽소군은 칼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그러나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볼이며 턱이며 눈가며 어디 할 곳 없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이.....어리석은......”
벽소군은 몸을 돌려 동강에게 흘러가듯 달려간다. 동강을 도우려는 정민과 진호를 정수염이 또 한번 제지한다. 이제 진호와 정민, 그리고 용호의 눈에는 노골적인 불신과 적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수염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벽소군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어깨를 붙들고 있는 동강을 내려다본다. 푸르스름한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도...도대체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죠?”
“……”
“희생인가요.....치정인가요...?”
“아...아마도....”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이미 혼절을 하고도 남을 상처의 고통과 엄청난 출혈 속에서도 동강은 그저 식은 땀이나 흘리며 언사에 조금 어려움을 겪는 정도였다, 그의 체내에 습득된 무공이 그나마 모종의 진통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치정(癡情)일 것이요...희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도 격이 떨어지는.....”
“그래....당신이 자신의 팔을 바치면 이 피에 굶주린 악귀가 지레 만족하고 떨어질 줄 아셨나요...”
언어는 힐난조였다. 그러나 벽소군의 목소리는 보기 드물게 평정을 잃고 있었다, 정말 이 어리석은 사내를 향한 분노인지 아니면 측은지심일지 알 수 없을 격렬한 흔들림이.
“최소한 서정을 돌려달라 요구할 빌미는 줄 수 있었겠지요.....”
“……!”
벽소군의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꾹 쥐며 그녀는 동강을 넘어, 그리고 맞은 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여전히 뜻모를 웃음을 짓고 있는 무리들을 건너, 지붕을 건너, 한참이고  벋어나간 산자락의 달을 바라본다,
“이미 김정민과 홍진호를 꺾은 데 이어, 이 동강마저 굴복시킨 사람을 이길 사람은 거이타부에는 없을 것이오.”
“그렇다고 이렇게 비참한 결과만을 택할 이유는 없었을 터인데.....”
“후후....내가 말했잖소 치정이라고.....어리석은 자가 선택하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결말이 어디 있겠소.”
고통 속에서도 힘겹게 웃음을 짓던 동강이 비로소 얼굴을 들어 벽소군을 정시한다. 땀에 젖은 얼굴이지만 여전히 그의 눈가에는 벽소군을 향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서정에겐....시간이 얼마 없소.... 그리고 당신 역시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만을 힘겹게 골라 디뎌왔소......잠시라도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정말 행복하기를 바라며 보시한 내 팔목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소.....”
말을 마치고 동강은 푹 쓰러진다. 겨우겨우 버티어 오던 인내가 극심한 고통과 출혈에 마침내 굴복한 것이다.
“쏴라!”
그때 정수염의 손이 들렸다 떨어졌다. 그리고 수천개의 화살이 단 한사람 벽소군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벽소군의 눈에서 다시 한번 불꽃이 타올랐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들을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피하거나 칼로 막아 떨어뜨리면서 그녀는 어느 틈엔가 정수염의 면전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날아든 화살이 벽소군의 어깨와 등에 잔인하게 박혀든다.
“……!”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려는 벽소군, 그러나 자신의 검을 떨어뜨리고 만다. 만면에 희색을 보이는 정수염.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은 굳어지고 만다, 칼을 떨어뜨리고 의식을 잃으려는 벽소군을 어느틈엔가 동강이 달려와 남은 한쪽팔로 부둥켜안은 것이다. 그러면서 정수염을 바라보는 동강의 눈은 여지껏 보여준 적 없는 살의에 불타오르고 있다.
“이것이 옹감네 제일의 무술집단 거이타부의 수장이 할 행동이란 말이냐!”
“어서 그 계집 곁에서 떨어져라.....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과 공모해 자신을 암살하려던 첩자가 동강이었다고 음모를 꾸며대겠지.....하지만 절대 이 손만은 안 놓는다. 내가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인데!”
“그럼 같이 죽겠다는 것인가?”
“바라던 바다.....”
“너 말 무지 짧다는 거 아냐-_-++++”
“그러는 당신은 머리 무척 가볍다는 것을 아오?”
정수염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진다. 아연한 표정으로 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용호, 정민, 진호를 둘러보며 호기롭게 소리친다.
“저 암살자년과 배반자를 함께 쳐라! 쏴라!”
“쏘지 마라!”
돌연 얼노우 홍진호가 소리를 지른다. 마린 김정민과 볼다구 조용호도 자신의 수하들에게 사격중지를 외친다. 그러나 앞서 벽소군을 쓰러뜨린 화살 두개가 다시금 어둠 속에서 날아든다. 주변을 수습하느라 황망중이던 진호와 정민 그리고 용호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거이타부 무사들은 등을 보이는 사람을 겨누지 않는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에 벽소군은 눈을 뜬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그리운 얼굴이 빛나는 금갑 투구속에 환하게 웃음짓고 있다.
“저....점석..점석아......<다시 한번 강조!!! 점석은 벽소군만이 부를 수 있었던 서정의 어릴적 별명임>”
“벽소군.”
동강이 벽소군을 부축해 서정의 품에 안기게 한다. 순간 동강과 서정의 시선이 교차한다. 축축한 동강의 눈가를 서정은 놓치지 않는다. 벽소군을 안으면서 동강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는 서정. 그러나 벽소군이 자신의 손을 떠나면서 동강은 다시금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서고 있다.
“지...지금.....나에게 항명하는 것이냐!”
“항명이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김정민이 단정한 얼굴에 가득 분노를 담아 정수염을 정시하며 말한다. 아뿔싸, 이럴 줄 알았으면 송병석 장군의 병력을 후방경비로 돌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최측근을 가장 최후방으로 보낸 자신의 불찰을 정수염은 절감하고 있었다.
서정은 벽소군의 창백한 얼굴을 눈물 반 웃음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벽소군 역시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버텨가며 눈에 못넣어 아픔이던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고 어루만지곤 한다.
“나...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예기치 않았던 부하들의 반기에 이제사 사색이 된 정수염이 억지위엄이나마 꾸며가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동강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연다.
“단 두 가지입니다.”
“단 두 가지라고....?”
동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틈을 보아 몸을 피하려던 정수염은 뒤를 돌아본 순간, 불나주 변길섭이 특유의 -_- 표정에 불꽃을 피워올리는 것을 보고 탈출마저도 단념한다.
“그렇습니다....첫째,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불문에 붙인다.  그 어느 문파 개인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으며 뒷조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동강은 잠시 말을 끊고 서정과 서정의 품에 안겨 이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음짓는 벽소군의 얼굴을 아프게, 참으로 아프게 바라본 다음 말을 이었다.
“서정과 벽소군을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서정은 주라이와 결승전이 있다. 거이타부의 명예가 걸린 결승전을 포기하란 말이냐!!”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정수염의 음성이 오기를 탄 듯 높아졌다. 그러나 반응하는 동강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거이타부의 명예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겠지요.”
정곡을 찔린 듯 정수염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서정도 놀란 얼굴로 동강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제 동강은 서정과 벽소군을 돌아보지 않는다. 다만 꾹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정에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당신이 연생마인의 골혈파장에 당한 서정의 척추와 목뼈의 악충을 미약으로만 통증을 속여왔기 때문에 그에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동강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 이곳 저곳에 습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서정이 지금껏 싸워온 것은, 오직 한 여자를 위해서였고 또한 한 여자를 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힘겹게 서로를 만났습니다. 서정이 세상에서 택한 단 하나의 행복의 목록은 저 벽소군입니다. 그러니 서정과 벽소군을 놓아주십시오, 세상이 저들을 이리도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번 한번만이라도 저들 뜻대로 할 수 있게....”
정수염은 망설인다. 참으로 오랜만에 무림제일인자를 배출하는 영광을 잡을 기회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공염불이 된다는 것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생각보다 길지 못했다, 소리없이 다가온 변길섭이 어느틈엔가 그의 등에 단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_-
“아....알았다....”
안타까움보다는 탐욕의 좌절이 깊게 배어든 정수염의 입이 떨어졌다. 서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동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동강은 뒤를 돌아 서정과 벽소군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동강.....”
“다...당신.....”
서정과 벽소군이 동강을 불렀다, 그러나 동강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제 서정은 거이타부 무관이 아니오. 이곳은 군문, 기밀유지가 중요시되는 곳이오니 거이타부 소속이 아닌 분들은 속히 돌아가 주시기를 바라오,”
“고....고맙네.......”
서정과 벽소군은 여전히 등을 보이는 동강에게 존경의 염을 담은 절을 한다. 그리고 볼다구 조용호가 두 마리의 준마를 끌고 온다.
“이걸 타고 가라. 식량과 의약품은 있는대로 한달분 정도는 준비해 두었다.”
서정은 볼다구가 내미는 보따리를 받아든다. 화살에 맞은 상처로 인해 고통은 여전했지만 벽소군 역시 활짝 개인 웃음을 조용호에게 보인다.
“참말 이쁘다. 진즉 알았다면 보쌈해 왔을텐데....”
볼을 부풀리며 조용호가 밉지 않은 농담을 한다. 처음으로 정수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도...동강....”
벽소군이 동강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동강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감...감사합니다....팔을 뺏어간 원수에게 이토록 덕을 베푸시다니.....”
“그냥 예전에 제가 벽소군님에게 빚졌던 한끼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를 이제야 갚은 것이라 생각해주십시오.”
“……”
벽소군은 동강의 뒤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수그린다. 그리고는 이미 말에 올라탄 서정에게 다가가 곁에 서있는 말에 부축을 받으며 올라탄다.
“잘 가게.....”
동강이 끝내 뒤돌아보지 않으며 말한다. 서정과 벽소군은 붉어지는 눈가를 애써 수습하며,
“알았네....자네에게도 무운이 창성하기를...”  
동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서정과 벽소군은 그런 동강을 바라보다 이내 말에 박차를 가한다.
말들이 한번 큰 소리를 내지르고 이내 발굽을 울리며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거이타부 영내를 벗어나는 두 마리의 말.
그제서야 동강은 뒤를 돌아본다. 막 떠오르려는 일출의 지평선으로 나란히 달리는 두 마리의 말, 그리고 두 사람이 따갑게 동강의 눈을 찔러온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알려진 서정과 벽소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단 한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생사여부는 자연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동강은 두 사람이 이제야 행복을 찾았다고, 때문에 오랫동안 헤맨만큼 정말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하늘에 연거푸 다짐을 놓고 있었다.

9. 에필로그 -그녀의 눈물/ 출국(出國)

공항 대합실에서 창백한 얼굴로 출발시각을 기다리던 녀석은 느닷없이 나타난 나를 보자 잠시 입을 벌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보였다. 나 역시 다분히 충동구매적인 성향이 강한 내 생겨먹은 성질머리를 탓하고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어젯밤에야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이 문제였다. 무협소설에 가까운 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 말 그대로 습작에 가까운 듯한 소설일 뿐이었다. 그러나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운 내 뇌리에 자꾸만 책의 내용과 어제 박정석과 박성준의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전해진 뒷 이야기가 파고들었다.

해원님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 갔어요.

대구에서 벌어진 결승전에 구경갔다가 전화로 연락을 한 영록군(일명 수광황혼 ㅇ0ㅇ;;;)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였을까.
벽소군이라는 먼 예전의 여자가 해원님과 겹쳐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정이라는 인물에게서 결승전에서 패한 박정석 선수의 비운이 떠오른 이유는.
대체 무엇을 노린 것이었을까.
내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녀석이 굳이 내게 이 책자를 건네준 이유는.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하고 잠든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딱히 마음에 결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물리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나는 애꿏은 이명박 시장을 타박하며 공항까지 가는 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었다.

차나 한잔 할까요?
비행기 시간 다 되지 않았어?
아직 이십분 정도 남았어요.
커피숍같은데 가기엔 너무 빠듯하고....자!
...어인 캔커피?
이따 갈 때 입가심으로 마실까 사둔 것이었는데 요긴하게 되었네.....
……
……
저한테 뭐 부탁할 거 없어요? 혹 원서라든가, 문학정보라든가....
원서는 국어도 낑낑거리는 나한텐 먼 나라 이야기고 부탁이 하나 있긴 있다.
뭔데요?
도착하면 전화나 한번 해줘.
전화 한번이요?
그래 맥빠지게 겨우 도착했어요 이렇게 말해서 듣는 사람 기운빠지게 말고 기운차게 여긴 미국입니다. 이상 XXX였습니다. 라고 전화 한번만 해줘.
그거면 돼요?
그래 그것뿐이면 돼.

그리고 녀석은 어색한 웃음과 몇 번의 뒤돌아봄으로 한국에서의 2박3일을 마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천천히 폭염이 지배하는 공항 입구를 걸어나왔다. 또 이별이었다.

  서정의 테마곡

새 -김동률 글/곡  

날 보고 있나요 별이 지는 저 하늘 위에선
너무도 작은 나이겠죠
듣고 있나요 그대 떠난 뒤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나의 기도를

별이 가득한 어느 여름밤 꿈꾸듯 내게 말했죠
그대 영원히 머물 곳은 저 하늘 너머라고

그 어디쯤 있나요 내게 닿을 순 없나요
그대 없는 이 세상에 내 쉴 곳은 없나요

나 이제 훨훨 날아올라 오래전 잃어버린 네 영혼을 찾아
그곳에서 날 기다릴 그댈 향해 날아

                                                           <끝>

1. 또 끝냈습니다(유일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2. 종극연생마인전과 너무 붕어빵 같다는 ㅠ_ㅠ
3. 구슬 이외의 다른 곳으로 절대 옮길 수 없습니다;;;(저 죽어요 ㅠ_ㅠ)
4. 이젠 다신 이런 글 안써!!! ㅠ_ㅠ
5. 관련 서플먼트는 조만간 올라옵니다;;;

* 몽패랜덤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16 00:56)

04-08-11 02:49:16
  phoenix     04-08-11  
 이제 다신 이런 글 안쓰신다면.... 너무 해요...
피씨방에서 항상 몽패대사님 글을 기다려왔는데...
그건 소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옵니다.
역시 몽패대사님의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몽패님 최고!!!  
  Real Corean     04-08-11  
 이번에도 역시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다신 이런 글을 안쓴다니요....
너무 이기적입니다. 흑흑ㅠㅠ  
  p.p     04-08-11  
 “왜 하필 당신인가요?”
“지금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오......”

울다가...


“너 말 무지 짧다는 거 아냐?”
“그러는 당신은 머리 무척 가볍다는 것을 아오?”

웃다가... ㅋㅋ큼큼 (코 나올 뻔 했어요)



서정은 벽소군의 창백한 얼굴을 눈물 반 웃음 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벽소군 역시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버텨가며...

기어코 휴지를 뽑아 내서 눈가를 찍습니다.
코도 팽, 하고 한번 풉니다.




저는 대사님의 글을 구슬에서 바로 읽지 못합니다. 대사님도 인정하시다시피 너무도 빼곡하여 저 같은 노안으로는 제대로 읽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문을 드래그하여 [훈민정음]에 붙여넣기합니다.

[훈민정음]에서는 글자도 크게 보이고 또 읽다가 엔터만 치면 제 맘대로 칸 띄우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고 읽어 내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차분히 정독하고 감상하기에 다시 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이번의 대사님 소설도... 저를...

저의 눈물 콧물 쏙 빼 놓았습니다.

대사님 쵝오!!!


리얼코리안// 넌 도대체 누구냐? 첫째냐? 둘째냐? 우리 구슬가족들과 만날 때 둘이서 번갈아 가며 나타 난게지? 흠흠흠...
나도현이에게 흑마술 가르쳤다는 창원싸우론이 바로 너였구낫!!!  
  VIVID     04-08-11  
 아..감동이네요; 몽패님.
드디어 완결!!!
러브스토리에 약하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써주실 줄이야.
이글을 읽고 볼이 발개질 모운영자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네요.

몽패님이 요즘 왕성한 활동을 보이셔서 구슬에 올맛이 난다니까요.
몽패님의 글은 계속 되어야한다.....쭉~~~  
  해원     04-08-12  
 물빛노을:해원님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 갔어요.
전상욱: 원래 부었어.

-_-;;라고 하진 않겠죵;;; (사실 부은 눈이었는데;;)

예전에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보다는 무언가 결함이 있거나 비범한 인생을 사는..(뭐 대략 드라마에 나오는 특별한 상황의 주인공들을 떠올리면 될 듯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욱 더 사랑에 빠져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드라마의 그런 설정들이 100%엉터리는 아니라는 글이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살수로 키워진 사람이... 또 무림의 한 영웅이.. 그렇게 애절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무협지에 그려지는 수많은 사랑들도 드라마의 사랑을 옹호하듯 그 논리를 적용시킬 수 있겠지요? ^^ 제가 아는 박정석을 쪼끔 닯은 오라버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태권도 검도 쿵후 유도 무예타이 안해본 거 없는 종합무술인이었는데(별명도 종합무술인, 또는 카우킹 <- -_-; 등치보면 바로 인정) 무술인은 순수하다. 란 명언을 남기셨죠. ㅎ_ㅎ.. 뭐 이성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서 그 말에 나름대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었죠. 그 오라버니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생각이 나네요. 지하철에 자리가 나자 저더라 앉으라고 하고 늠름하게 서있던 모습을 쳐다보다가 그 오라버니의 손에서 반짝이는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커플링을 보았습니다...

몽패님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죠? ^^
동강 참 멋지네요. 서정은 당근빠따 +ㅁ+~
그리고 몽패님도 멋져요~ (서정만큼~ ^_^;; )  
  [淚]     04-08-12  
 동강 ㅠ0ㅠ!









이 아니라^^
그 결승전 이후 가슴아팠을 해원님을 웃음짓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너무 재미있어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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