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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망君 
  http://www.cyworld.com/9min
  골방
이 글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누나가 어버이날에
쓴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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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면동 집에 이사 오기 전,
우리집은 36평 방 세칸짜리 집에 식구 일곱이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아이들이 셋이나 되고
집은 좁고

우리 가족들의 소원은
화장실이 하나 더 생겨서
명절때 스무명도 넘는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앞에 만들던 줄을 좀 줄였으면
하는 거였다

아이들의 침대방에는 책상을 놓을 데가 없어서
안방에 책상 세개가 조로록 있었던
(그렇게 부모님 앞에서도 뻔히 공부했었는데
왜 지금은 도서관에서도 공부가 잘 안되는지 모르겠다.. -_-
사람들 북적거리는데서 자라와서
적막하고 한산한 곳에 대한 열망이 생겼는지도...)

부모님의 바램은
그래도 명색이 여자아이인데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을 하나 주었으면

그래서
급기야
다용도실을
골방으로 만들어 주셨다

내가 누우면
위아래로 10cm쯤 남고
옆에는 간신히 책상 하나가 들어가는
일종의 고시원 느낌이 나는 방이었다

늘 바로 문앞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난방이 되지 않은 관계로 늘상 전기장판을 틀어 놓고
밤에 불을 켜면 사사삭.. 거리면서 바퀴벌레가...
(오래된 아파트라 도저히 구제 안되는...)
돌아댕기는 그런 방이었지만

그 좁아 터진 와중에도 온갖 잡동사니로 방을 넘치게 만들었지만

'내방' 이었다
처음으로 가진

터미네이터 2의 에드워드 펄롱에 반해
그의 사진을 미닫이 문에 붙여 놓았었고

만화를 처음 만나고 알아가던 때라

서점 아저씨한테 용감히(내 성격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용감했던) 부탁해서 얻은
김진의 '바람의 나라' 커다란 포스터를 벽에 붙여 놓고서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폐지 수거를 위해 내놓아진 만화책들을 줏어와서
예쁜 컷들을 스크랩하고
작품별로 모아서 단편집을 만들고
(그러니.. 내돈으로 만화책을 살 수 있게 되었던 때의 감격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랬던 방이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 잡혀
삶에 대한 의문에 휩싸여서
몇 달을 밤에 울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방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만들어준 짬뽕 테잎
역시나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얻은
탑건의 OST, 프리티우먼 OST, 마이클 볼튼과 머라이어캐리의 복사 테이프를
늘어질 정도로 듣고

매일밤엔 별밤을 들으면서

숙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했던 방이었다

지금도 기억나
과학고를 가겠다고 했더니

어느날
엄마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아서

진지하게
'정말 가고 싶은 거니? 왜 가고 싶은데?'
라고 물었을때

특별한 동기가 없었던
나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는지
거의 울듯하면서
'영어는 못하니까' 라고... (아우 불쌍해.. -_-)

사실 남들 다 간대니까 가고 싶었던 것일뿐.
과학고가 뭔지도 몰랐었으니...

그래서 나름대로
과학고 준비를 한답시고
중3 여름방학
집에서
채도 낮은 붉은색과 회색으로 디자인된
하이레벨 수학 문제집과
과학고 대비 문제집 한권을 풀어 내었던 방.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었을때

부모님은
'고맙다' 고 먼저 말씀 하셨다
'축하한다' '장하다'가 먼저가 아니라
고마워 하셨다.
부모님은 늘
그 골방에서 공부하는 내가 안쓰러우셨던 것이다
나에게 미안해 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솔직히 이후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도
스탠포드에 어드미션을 받았을 때도
과학고에 합격했을 때만큼 고마워하시지는 않았다.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어쩌면 과학고에 응시하기로 한 것은
정말 내가 '스스로' 나의 길을 찾았던 최초의 순간이었다
(비록 영어를 못하니 외고가 아니라 과학고를 가겠다라는 별 고민없는 선택이었으나..)
부모님의 지도에 비교적 잘 따라와주던 딸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했던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낸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는 더이상 부모님은 '공부'에 대해서는
그닥 말씀이 없으셨다
보이는 것은 게으르고 좀 더 해야 될 것 같이 보일지라도
내가 그것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된 것이다.

부모님은
특히 우리 아버지는
변변한 방하나도 주지 못했는데
늘 사람들 들락날락 거리고
시끌시끌 북적북적한 환경에서
용케 공부해 내고
자기 앞가름 한 딸이라고 생각해 주신다

하지만

나에게 딸이라고 한계를 지우지 않았던 부모님
딸이 아니라
한사람의 사람으로 몫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부모님
나를 늘 자랑스러워 해주셨던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던 것은

그 어떤 넓찍한 방보다도
과목별 고액과외보다도
더 값진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믿음' 말이다
늘 버팀목이 되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 말이다

나는 유학준비를 하면서
공공연히 재정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유학가지 않겠다 라고 했다
더 공부하자는 것은 자기 욕심인데
부모님에게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앞가름은 스스로 해야할 나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번 장학 지원에서 고배를 마시고
적잖이 실망하고 기운빠지는 모습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그게 서운하셨나 보다
약주가 좀 되셔서 오신 밤에
나를 붙들어 앉히고는
장학금 받지 않아도
유학 보내 줄 수 있다고
아버지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속상해 하셨다

늘 자식들에게
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더 해줄 수 있는데 못해준다고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못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공부방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경제적인 자립을 하여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집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서서 걸어오신 부모님을 늘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앞가름을 하고 자기 몫을 해내야 한다는 것은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시던 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내게 마련해 주신 골방에 처음 누웠을때
깨달았다

부모님이
언제고
내 편이라는거
최고의 환경을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

나에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종내는 부모님한테 의존하고 있긴하다.. -_-; 하여간 말만 번드르르해.)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

단 두 번 사귀는 사람을 보여 드렸지만
(하도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에 흥분하시고 신나하셔서.. -_-
딸래미가 공부엔 소질있어도 그 쪽 방면엔 영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음.)


결론은
니가 고른 사람은 믿는다였다
좋은 사람이겠지
생각해 주신다

좀 특이한 구석이 있어도
내가 정신적으로 강하고 적응력이 있는 것

그리고 내가 내인생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내 일상을 행복하다고 떠들수 있는 것

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해 주는
부모님의 믿음이 단단하지 않았던들
가능할 수가 없다.

나는

언젠가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 모든 것이 자그마한 골방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곳에서

훌쩍 자라나던 키만큼이나

매일 매일
부쩍 부쩍

삶에 대한 긍정
나 자신에 대한 의지
믿음이 가지는 힘

이 내 안에 자라났었던 것이다









어버이날을 기념하며~ 2005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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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아침에 이 글을 보고나서.. 저는 ..너무나도
부모님께 죄송하고 제 자신에게 부끄러웠습니다.

정말 전 정신 좀 차려야겠습니다...!!

(이렇게 정신차리게 해주는 누나가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 해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5-13 02:36)

05-05-10 18:38:52
  삽질     05-05-10  
 좋은 글이네요^^;

부모님이 나라에 아니 계신 관계로 어버이날에 전화도 못드렸습니다만 (.. )a
아무튼 좋은 누나 두신 것 같아서 부러운 마음이 살짝...  
  p.p     05-05-10  
 좋은 딸 두신 규망군 부모님께 부러움이 살짝...  
  낡은운동화     05-05-10  
 정말 멋진 누나에 멋진 부모님이시네요..
어쩌면 세상에 모든 자식을 가지신 부모님은 그 이름만으로도 벅차고 큰 사랑을 가지신 사람들이시겠죠.

전 아직도 저런 이야기를 내어뱉지 못합니다.
적은 나이도 아닌 내가 아직도 내 어미, 아비의 주름의 의미를
그들의 얼굴에 가려진 그늘을 잘 모르고 삽니다.
아니 모르는게 아니라 모른척 살아가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규망님 누님처럼 의연한 말을 내어 뱉을 자신이 없습니다.
내어진 말이 진실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할까 살짝 두렵기 때문입니다.  
  년년s     05-05-11  
 진짜로 멋진 분이신 것 같아요. 전 아직 덜 자랐나봐요.  
  베르커드     05-05-11  
 규망님은 행복하신 겁니다. 저런 누님이 계셔서.
(흑... 내 동생은 언제 철들꼬 OTL)  
  phoenix     05-05-11  
 아직도 한없이 받기만 한 입장이라 댓글 달기가 무서워집니다.
전 정말 아직 철들려면 멀었군요.
왠지 규망님이 굉장히 부러워지네요.  
  water ncw     05-05-12  
 규망君님, 멋집니다. ^_^  
  해원     05-05-15  
 규망군 누님되시는 분...
그분처럼 저도 훌륭한 딸이자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네요.
정말 부럽고 또 존경할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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